박사학위에 대한 소고

박사학위와 석사학위는 본질적으로 다르다고 한다. 학부과정이후 연구에 참여한다는 점에서는 비슷하지만 박사학위과정이 기간도 더 길고 사회에 나와서 (연구직에 종사할 겨우) 연봉도 차이가 나기도 한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박사학위가 갖는 의미는 학위를 받은 그 분야에서의 전문성뿐만이 아니라 중요한 다른 무엇 하나가 더 있다고 생각한다.

인간의 인지능력이 한계가 있다는 가정하에서, 어떤 연구분야를 연구하기 위해서　(자신뿐이 아니라) 다른이가 이해할 수 있도록 어떤 현상을 기획/발현시켜서 설명해야 하는데 이를 위해서 논리적으로 그 현상을 재구성해야 한다.　그러므로 명쾌한 설명을 위한 논리를 구현하기 위해서 그 현상을 설명할 틀을 디자인해야 한다. 그 틀은 구체적으로 이론/설정된 실험/공식이 될 수 도 있지만 광의적으로 볼 때 방법론이라 칭할 수 있다.

박사학위 과정동안에 얻어야 할 것이 이 방법론이다. 한 분야에서 (적절하게) 취득된 박사학위는 이 방법론의 습득을 의미하며, 그 학위취득자가 다른분야로 진출하여 연구를 시작해도 이 방법론을 쓸 수 있으며 외연을 확대하여 새로운 방법론을 만들고 또한 적용할 수 있다. 박사학위의 본질은 이 방법론의 습득에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기 셋업된 실험실에서 운좋게 실험결과를 쭉쭉 뽑아내서 많은 논문을 썼다고 해도 이 방법론을 얻지 못하면 사상누각과 마찬가지이다. 사실 고생스럽게 실험실 및 기자재 세팅을 하는 등 많은 시간을 이 방법론 습득에 쏟아 부은 사람들은 실질적으로 논문 실적이 별로 많지 않을 가능성이 많으므로, 논문실적 기준만으로 박사학위자를 절대적으로 재단하는 것은 위험한 일인 것이다.

상기에 언급한 방법론은 지도교수님이나 실험실 선/후배에게 전적으로 의지해서 배울 수 없는 것이다. 새로운 아이디어를 내어 연구 방법 및 접근 방법을 스스로 기획해야 하기 때문이다. 박사학위 과정동안에 많은 시간동안 시행착오를 거쳐서 결국 가장 효율적이며 적절한 방법론의 노하우를 얻게 되며 이는 돈으로도 살 수 없는, 매우 소중한 개인적/정신적 자산이 되는 것이다. 특히 실패한 방법론에 대한 되새김이 매우 중요한 과정이며 사실은 이를 공식적으로 문서화하는 것이 바람직하다.

그러나 불행히도 요즈음에는 이러한 방법론의 개발을 경험할 수 있는 연구풍토 조성이 거의 불가능하다. 우리나라 연구자 대부분이, 연구방향이 대부분 정해져 있는, 선진국의 차세대 연구주제를 연구해야 하기 때문이다. 특히, 미국을 중심으로 이미 한창 연구가 진행되고 있는, 그래서 연구 방향이 확고하게 정해져 있는 분야들이 대부분의 연구자금을 독식하고 있기 때문이기도 하다. 독창적인 연구의 실패를 두려워하는 풍토는 결국 연구의 자유도를 줄일 뿐만이 아니라 연구를 수능공부준비 같은 수준으로 전락시킨다. 우리나라에 창조적인 연구자가 설곳이 점점 없어지는 것은 두 말할 필요가 없다.

스스로 논문 한편 논리적으로 제대로 쓰지 못하면서 수십편의 논문을 양산하는 연구자들을 이제 흔하게 본다. 기 세팅된 실험세트에서 이리저리 응용대상을 바꾸어가면서 복사된 방법론으로 실험/분석하고 (요즘은 보편화되 있는) 논문 교정 서비스의 도움을 받아서 많은 논문을 양산하여 박사학위를 받는 사람들을 매우 흔하게 볼 수 있다. 우리나라에 진정한 박사들이 과연 배출되고 있는 것인가?